Wednesday, April 18, 2012

회고록 3 -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 … 운명이 된 조우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 … 운명이 된 조우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3) 8·15 해방과 나의 영어공부
2012년 04월 18일 (수) 18:06:56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이 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다. 내 나이가 15세였을 때다. 한국이 해방된 후 6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방되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일본 식민지 통치 36년 동안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은 해방된 조국을 찾아왔다. 그들은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우리 중학생들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식민지 통치 밑에서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식민지 통치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 청년 학생들은 일본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군수공장에서 일했으며 또는 농장에서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한국이 해방됐었을 때 우리 청년학생 들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갈구했다. 우리 중학생들 중 한사람도 빠짐없이 조국해방의 감격 속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것이 어제만 같은데 벌서 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우리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선으로 남북으로 분단했다.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완전히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한반도 분단이 정착되기 시작했고, 남북 간의 분단은 반세기가 넘게 지속됐다.
한반도는 냉전시대의 소산물이다. 주한 미군은 6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해방 전후의 우리들의 역사를 어떻게 한권의 회고록에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조국이 해방된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깊숙이, 또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을 뿐이다.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우다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미국 기독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시 원주에 돌아와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1946년이다. 일제시대의 중학교에서는 영어의 알파벳 정도만 공부했는데 일본 선생들의 영어 발음은 웃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홋도 이즈 잣또” (What is that?) “잣도 이즈 캿도” (That is a Cat) 식의 일본식 영어 발음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정도였다.
강원도 원주의 일산동에는 벽돌 양옥집이 3채가 있었다. 6?25전쟁 중 원주시내에 있던 모든 건물은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했을 때 미군 항공기의 폭탄세례를 받고 다 파괴됐지만 일산동에 세운 양옥 벽돌집 세 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오른편의 붉은 벽돌 양옥집 한 채는 미국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그의 한국명은 羅 愛施德이다) 선교사가 살고 있었다. 다른 한 채는 켄터키 주의 애스베리대학(Asbury Collge)(2000년부터는 Asbu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찰스 스토크스(Charles Stokes) 박사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세번째 양옥집 역시 미국 켄터키주 의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한국에 파견된 감리교 선교사 벅크홀더(Buckholder) 부부가 입주하고 있었다.
스토크스 박사 부부와 버크홀더 선교사 부부는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해외파견 선교사로 자원한 인물들이다. 1945년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원주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던 그들은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겨울 방학에는 영어회화반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원주농업고등학교 선생들 중 정태시 선생, 장재용 선생, 송동수 선생 등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선생님들이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느끼고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학생 몇 명을 선발해 레어드 선교사(나 애시덕)가 겨울방학동안에 이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주 주일날 오후 2시에는 레어드 선교사 자택에 선생님들과 학생들 10여 명이 모여서 영어예배(English Worship Service)도 보기 시작했다. 영어회화반에 다니던 우리 고등학교 학생도 초대됐는데, 영어회화를 실제로 생생하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70여 년 가까이 지난 오늘 그 당시의 영어공부 하던 시절의 일들은 내 기억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미국감리교 선교사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실용적이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선교사의 헌신적인 영어교육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한국전쟁 당시에 육군 연락장교로서 미국군과 한국군 지휘관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가 미국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영어로 공부하고, 또 영어회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터 레어드 선교사를 비롯해 앞서 말한 이들, 그리고 세디 모어 (Sadie Moore)선교사, 단기 선교사로 파견된 젊은 스핀드로우(Spindlow) 선교사의 덕택이었다. 나는 늘 이들에게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헌신적인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영어교육을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개척정신과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시고 나를 영어 성경반에 인도해 주신 고등학교 은사님 정태시 선생 (대한교련 사무총창을 거처 공주사범대학 총장 역임), 장재용 선생 (한국 외무부에서 주 뉴욕 총영사, 스페인 대사 역임), 그리고 김기순 선생 (한국외국어 대학 영어교수 역임)의 지도와 편달에 항상 깊은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ster Laird (羅愛施德)선생, 그는 누구인가?

Ester Laird(나애시덕) 선교사(1960)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훗날 김일평 교수가 있게 만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은 나의 은사이며 잊을 수 없는 미국 사람(Unforgettable American) 이기 때문에 나의 운명적인 선생으로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중학생시절 겨울방학 동안 나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또 나 선생 때문에 성경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며, 한국동란 때는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임관해 연락장교로 복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애시덕 (Ester Laird) 선생은 누구인가?
레어드 선생은 1901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고 딕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종교교육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모닝 선 스쿨(Morning Sun School)에서 교편을 잡은 경험도 있다. 1926년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강원도 원주에 파견돼 1930년부터 기독교여자사회관, 영아원, 결핵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부녀자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끈질긴 선교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녀는 안식년인 1927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1930년까지 3년간 고향에 머물면서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모금해 1931년 원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원주 기독교 여성회관 관장의 책임을 맡아서 10여 년 동안 봉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 일본제국주의 군부지도자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식민지 조선에서 추방했다. 레어드 선교사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있는 베데스타 병원 부속 간호대학에서 간호사 전문교육을 받고 졸업했다. 그녀의 삶은 봉사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일관됐다. 그녀는 이후 병원에서 일하며 전문 간호사를 교육할 수 있는 간호사교육 자격증도 받았다.
레어드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된 후 1947년에 원주로 다시 돌아와서 6·25전쟁이 나던 1950년까지 기독교 사회사업을 계속하면서 기독교 청년 지도자를 많이 육성했다. 그녀는 원주의 사회봉사회관에 유아원을 설치하고 어린아이가 출생했을 때 모유가 부족한 어린 영아들을 모아 우유를 공급해서 새로 출산한 아이의 생명을 구해주는 구명사업도 원주 기독교 사회사업관에서 함께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의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해(그 당시 원주에는 여성이 승용차를 스스로 운전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몇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달려가서 모유가 부족한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분유를 먹였다. 당시 시골의 어머니들은 외국인 여성에게 자기의 갓난아이를 선뜻 외국인에게 맡길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유를 먹이는 것도 반대하는 전통적인 어머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레어드 선교사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성어린 사업에 감복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강원도 원주의 여러 동리에서 레어드 선교사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원주 시민들 사이에는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 원주 사람들은 그녀를 '羅 부인' 또는 '羅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에스터 레어드'였기 때문에 한국 이름을 '羅 愛施德'이라고 지어 주었다. 사랑을 널리 베풀고 덕이 많은 羅 선생이라는 말이다.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 선생님들은 羅愛施德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더 훌륭한 영어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한국동란 후에는 외교관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또 국제적인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전기는『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최종수 지음,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를 참조하기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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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에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시는
김흥수 교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와서 본문을 약간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교수신문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글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을 발견하고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글 중에 "캔터키 주의 애스베리대학 (Asbury College)(2000년 부터는 Asbu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듀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찰스 스톡스 박사 부부는"을 언급하셨습니다. 스톡스 박사는 Asry College 와 Asbury Seminary 에서 공부한 후 듀크대가 아니라 예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논문 "History of Methodist Mission in Korea 1885-1930 은 몇해전 한글로 번역되어 서울에서 간행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보고 서신도 "Letters of Charles D. Stokes로 서울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김흥수 교수님 매우 감사합니다. (저자 드림)

회고록 2 - 한국인과 미국인, 역사 경험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한국인과 미국인, 역사 경험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2)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
2012년 04월 04일 (수) 17:47:18 김일평 미 코넷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나는 무엇 때문에 나의 회고록을 쓰게 됐는가? 20여 년 전(1980년대)에 서울에서 개최된 어느 학술회의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토론시간에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 차이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국가이익의 상충, 한국전쟁 후 한·미관계 50년의 역사상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매우 다양한 토론을 전개 하면서 한국과 미국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매우 심각한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반세기가 넘게 살았다. 대학부터 대학원에 이르기 까지 10여 년을 공부하면서 또 대학교의 교수생활을 40여 년 동안 하면서 미국에 60년 가까이 살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에만 집중하고 학문세계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미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축적됐고 또 미국을 보는 새로운 관점도 생겼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에 유학 오는 유학생들에게 미국사회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방법도 자연히 가르치게 됐다. 미국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이며 또 슬기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각종 분야에 걸쳐 상담하기도 했다. 미국생활의 지혜도 생겼을 뿐만 아니라 또 미국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얻게 됐다. 이런 점에서 앞선 글에서 나는 '한국에서 미국유학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나의 회고록이 도움이 되고 또 미국유학을 떠나는 유학생과 미국으로 유학 오는 한국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 또는 참고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했거니와, 이것이 내가 회고록을 쓰는 동기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미국에 관한 지식과 미국문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 정도는 미국사람의 한국에 대한 지식과 이해 정도와는 차이점이 많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왜 우리나라에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미군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가?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 대해 무엇을 배우고 또 미국의 미래에 대해 무엇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미국에 대해 축적한 나의 지식은 미국을 이해하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이해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것이 또 다른 집필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학생과 젊은 세대가 품고 있는 반미감정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한국인과 미국인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상호간의 이해가 증진 된다면 반미감정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일선에서 복무하면서 미군장교와 장성들 그리고 한국군 장성과 장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통역한 경험도 있다. 또 각계 각층의 한국군 참모들의 생각과 작전 계획을 미군장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노력한 경험도 있다. 또 미국 측의 생각과 작전계획을 한국군 장성들에게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가교역할도 했다. 따라서 우리 연락장교들은 한국과 미국 쌍방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제2군단본부에서 벤프리대장 통역-좌로 부터 유재흥 군단장,백선엽참모총장,필자, 베프리트 대장.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매우 심각했고, 한미 간의 가치관의 차이를 서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맹국 사이에도 마찰이 많이 생기고 또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미 간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여건도 많이 있었다.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 차이와 사고방식의 다른 점은 정책결정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상호간의 갈등요소가 된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고 미군 제8군사령부가 1950년 한국전쟁 후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아직도 서울에 주둔하고 있다. 한미 간의 견해 차이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견해차이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지 검토해 본 후 상호간에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한미 간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고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국인들의 말과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문화와 역사는 물론 미국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의 유학생활에서 얻은 일상생활의 경험은 미국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또 내가 미국에서 배우고 축적한 많은 지식과 지혜를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와 지식층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이해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또 우리 조국의 젊은 세대, 즉 신세대의 애국심과 독립정신 그리고 민족주의를 미국사람들이 깊이 이해하고 납득 할 수 있게끔 내가 설명하고 교육할 수 있다면 한미관계의 새로운 미래상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동시에 또한 바람직한 결과를 창출해 낼 수 있다면, 한미관계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세기가 넘게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했다. 또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교수생활을 하면서 미국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도 생겼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며, 미국사람들이 경험한 개척정신과 현대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와 비교하고 미래를 연구 할 수 있다면 나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비교연구는 한미상호간의 이해도 증진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의 차이로 생기는 두 나라 간의 마찰과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따라서 나의 회고록이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갈등을 좁히고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하며 서로 협조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비교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미국인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한미관계의 갈등과 마찰도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의 회고록은 학술적인 논문도 아니고 또 정치평론은 더욱 아니다. 나는 다만 미국유학 반세기동안 나 자신이 얻은 지식과 경험을 평범한 글로 써서 미국에 유학을 꿈꾸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고 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어떻게 변했으며,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어떻게 변했으며, 우리 한국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는지 이해하고 상호교류하며 지내는 데 작지만 도움 되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韓人들은 미국에 살면서 미국사람들 최상의 가치관인 '인간의 존엄성'을 잘 이해하고 미국 내에 형성된 한인사회(Korean Community)에도 인권의 존엄성이 신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미국사회의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인종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나의 회고록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계속>

회고록 1 - 후학에게 주는 미국 유학 60년의 교훈과 지혜

후학에게 주는 미국 유학 60년의 교훈과 지혜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1) 연재에 앞서
2012년 03월 13일 (화) 16:32:04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editor@kyosu.net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외교연구원 교수 등 미국내 연구자들을 지도, 후원하기도 했다. 국내 학자로는 김동성 중앙대 교수, 김동수 서울시립대 교수, 남정휴 경기대 교수, 기기정 연세대 교수, 홍욱헌 포스텍 교수, 김병일 경희대 교수 등이 그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교수신문> 김일평 교수의 회고록 '미국 유학 60년'을 이번 호부터 소개한다. 김일평 교수 회고록은 <교수신문> 인터넷판에 매주 연재될 예정이다. 김 교수의 회고록은 미국 내 한국학 연구 1세대의 형성과 그 과정에서의 자긍심, 그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국내 학계의 지적 교류 풍경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 1953년 9월 이였으니 벌서 반세기가 지나고 60년도 넘은 세월이 흘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도 많이 변하고 나도 많이 변했다. 물론 한국도 변하고, 세계도 천지개벽을 했다고 할 만큼 변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나는 미국에 유학생으로 와서 공부하면서 또 대학에서 젊은 세대를 가르치는 교수생활을 하면서 미국도 변하고, 한국도 변하고 그리고 세계가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미국유학 반세기 동안에 배운 것과 나의 인생경험을 나의 회고록에 기록해 놓기로 했다. 한국에서 미국유학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유학지망생과 그리고 우리 후세들에게 나의 회고록은 '미래에 대한 그들의 예측'이 될 수도 있고, 또 미래를 향한 역사적인 교훈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지난 해 타계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Paul Samuelson)은 그해 6월 “역사야 말로 어떤 가설이나 실험보다 더 좋은 자료"라고 말하면서 역사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나는 한국 유학생으로 1950년대에 미국에 와서 미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공부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실질적으로 경험했던, 살아있는 역사를 여기에 기록해 놓고자 한다. 나의 회고록은 격동기의 반세기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1930년 5월 5일 (경오년 말띠)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영월은 우리 조선역사의 6대조 단종왕의 묘가 있는 곳이 아닌가. 그리고 만주사변 (1931), 중일중전쟁 (일본과 중국의 전쟁, 1937~1945), 그리고 대동아 전쟁(제2차 세계대전, 1941~1945) 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차분하게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으로 유학하면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 (Korean War. 최근 한국언론에서는 6·25 전쟁이라고 통일함) 와중에서 나는 20대의 나이에 한국 육군 연락장교로 전쟁에 참전했다. 한국군에서 3년간의 육군 연락장교의 임무를 끝마치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다. 6·25전쟁 중 나는 연락 장교로서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역할을 담당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내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초반 25년간은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격동 속에서 흘러갔으며, 곧이어 6·25전쟁 중 일선에 나가서 전투에 참가하는 경험도 해 보았다. 그리고 남은 반세기는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또 미국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한국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도 있었다. 6·25전쟁 당시 잿더미로 변한 한국 땅에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 꿈을 품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수속을 거치고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23세의 나는 그해 9월에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유학은 한국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 같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나는 미국에서 유학생의 생활도 해보았고, 또 미국 대학교에서 교수로 오래 생활하기도 했다. 그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웠던가? 또 내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나의 유학 60년을 돌아보면서 유학생으로서의 생활과 미국대학의 교수로서의 생활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한국 학계에 다소나마 쓸모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이 소소한 회고에 담긴 한국 지식인의 미국 유학 과정과 지식의 습득이 우리 후배들에게 하나의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보람 있는 '회고'일 것이며, 응당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유학생활 과 미국대학에서 교수로 생활하면서 목격한 미국의 현대 역사도 이 회고록의 풍경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미국유학을 떠나게 됐으며, 낯선 미국사회에서 유학생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미국 역사를 배워왔는지, 그리고 미국 현대사에 대한 나의 느낀 바를 가능한 한 복기해내며 기록하고자 한다. 미국 유학생의 생활은 1950년대나 2000년대의 오늘까지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의 회고록에는 특히 미국에서 겪는 한국 유학생들의 고충, 그들의 의미 있는 학위취득 과정도 기록될 것이다. 역시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을 한국의 후학들에게 내밀한 미국 대학가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선택을 돕고자 하는 뜻에서다. 나의 회고록이 그들에게 하나의 '지침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미국으로 유학하는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미국의 역사와 미국사회의 변천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또 미국사회의 변천과정을 조금이라도 공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종종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살아왔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나침반이 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이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나는 '배우면 알고, 알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경구를 등불처럼 밝혀 집필 동기를 잃지 않고자 했다. 나는 한국에서 사반세기(25년) 동안 살았다. 또 미국에 와서는 반세기 넘게 살았으니 동양과 서양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비교할 수 있는 지혜와 철학도 얼추 생겼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어떻게 미래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작은 회고록이 그런 문제를 환기한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또 나의 회고록을 통해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비교 연구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접목 할 수 있을지 비전과 방법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인류의 희망사항인 세계평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 이 노구의 회고록을 통해 우리가 다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