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3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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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17, 2012

회고록 6 - 미스 레어드의 영어수업 … 고전보다 실용 강조

미스 레어드의 영어수업 … 고전보다 실용 강조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6)
2012년 05월 09일 (수) 17:08:25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강원도 원주에는 일본 통치시대인 1926년부터 감리교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선교사가 선교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을 때 일제는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선교사를 모두 추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레어드 선교사(나애시덕) 선교사도 할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원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사회봉사회관을 회수하고 수리해 기독교선교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그를 '나 선생'이라고 불렀다. 羅愛施德 선생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다.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영어회화도 능률 있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은 연재 앞글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947년 레어드 선교사는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은 물론 영어회화를 배우고 싶은 다른 분야의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도 운용했다. 그리고 겨울방학에는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 반을 시작해 영어회화를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작은 인연이었지만, 이것이 훗날 내 인생의 길목을 안내한 동력이 됐으니, 대단한 인연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우리 고등학교 영어선생님 가운데 송동수 선생이란 분이 계셨다. 그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서울 상업전문학교(해방 후에는 서울대 상과대학)를 다녔던 인텔리다. 송동수 선생은 일본군의 징집명령을 받고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해 태평양전쟁(1941~1945)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렇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1945년에 해방된 한국에 돌아왔다.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부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자기의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로 돌아가는 기차에 승차했다. 기차간에서 미국병사를 몇 사람 만났다. 그 병사는 영어로 “두 유 해부 어 잽 후래그” (Do you have a Japanese flag?)라고 물었다. 송 선생은 미군병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상업전문학교에서 일본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렇게 영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니…… 한탄과 자괴심이 밀려왔다. 그는 자신이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배웠던 영어를 극복할 필요를 느꼈다. 영어회화를 좀 더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원주 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을 자원했다는 에피소드다. 송 선생님은 친척이 살고 있는 원주에 와서 원주농업고등학교의 영어선생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송 선생님으로부터 영어를 배운 기억이 있다.
레어드 선교사는1948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원주 기독교사회봉사회관에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을 위한 영어 회화반 (클라스)을 설치하고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시작 했다.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면서 실용적인 영어회화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낀 우리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레어드 선교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미국선교사가 우수한 고등학생들에게도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한국인 선생들이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레어드 선교사를 설득했던 것이다. 그런 결실로 1948년 겨울방학부터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은 영어회화반을 조직하고 영어회화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20~30명이 참석해 배우기 시작했으나 2주일 후에는 7~8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영어회화가 배우기 힘들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은 일본교육의 영향으로 고전을 읽고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만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미국의 교육은 그와 정반대로 실용적인 영어를 공부하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책을 많이 읽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영어를 배우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의 기본용어를 배워야 미국사람들과 회화를 시작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회화는 미국사회의 문화와 생활습관에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선 일상생활에 필요한 단어부터 많이 배우고 그와 같은 단어를 매일 사용해 생활화 할 수 있다면 영어공부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해방 직후 이른바 한국의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인텔리들은 어려운 한문과 고전영어를 쓰는 사람, 고전적인 셰익스피어식 영어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진짜 지성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 인텔리들로부터 받은 영향이기도 했다. 해방직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美軍이나 또 일반 미국사람을 만나게 되면 셰익스피어의 어려운 고전영어를 인용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상대방인 미국사람은 한국 지성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국인과 한국 신사 사이의 대화는 이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은 미국사람들은 무식하다고 속단하고 대화를 계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대화가 끊겨 버린다. 우리가 북한과 미국사이의 대화나 협상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로 '동문서답' 식의 그 모습과 똑 같은 현상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영어의 고전인 Tales from Shakespeare 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우리는 그 책을 텍스트로 채택했다. 그러나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레어드 선교사는 그 책은 집에서 읽어보고 질문이 있으면 회화 반에 와서 현대영어로 질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읽은 책의 내용을 잘 알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며, 영어회화를 습관화 할 수 있는 묘법이라고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영어회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즉 텍스트 북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중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구하기도 매우 힘들었다. 레어드 선생은 미국친지에게 연락해 교재들을 구해 주었다. 미국고등학교 교과서를 매일 한 장(Chapter)씩 읽고 그 내용을 자기 자신의 영어로 요약하는 것으로 회화 수업이 진행됐다. 영어문장을 암기해서 영작문을 짓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레어드 선생은 암기식 영어회화 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적인 영어를 배우는 것이 영어를 배우는 첫발을 딛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미국의 생활습관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어회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말과 영어의 차이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영어를 배우는데 기초단계는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의 영어교육은 장족의 발전이라할까 상당히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60여 년 전 우리가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단어를 몇 마디 사용해 회화연습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8·15 해방 후 우리가 레어드 선생으로부터 배운 영어회화는 우리 일생에 참으로 중요한 도구가 됐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육군 장교로 임관 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준 영어회화 덕택이다. 그리고 또 미국유학시험을 볼 때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이 질문하는 영어회화 테스트에도 무난히 합격해서 미국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녀의 새로운 영어교육과 희생적인 노력 때문이다. 그렇다고 레어드 선생은 영어회화를 가르치면서 그 어떤 보상도 보수도 받지 않았다. 그런 보수는 일체 없었다. 영어교육도 기독교 선교사업의 봉사정신 때문에 하는 것이었다. <계속>

Wednesday, May 9, 2012

회고록 5 - 해방 직전 원주농업중학교로 내려간 사연

해방 직전 원주농업중학교로 내려간 사연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5)
2012년 05월 02일 (수) 17:17:10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내가 미국 대사관에서 시행하는 유학시험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고 또 미국유학을 떠나서 미국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도 레어드 선생으로 부터 배운 영어회화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레어드 선생은 우리 고등학생들로부터 한 푼의 代價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공헌했으며, 영어를 가르치는 데 모든 노력을 충실히 잘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나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레어드 선생이 그 당시 열정적으로 가르친 영어교육의 효율성이다. 그녀의 희생적인 봉사생활을 생각하면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으며 존경의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온다.

김일평 교수는 자신의 미국 유학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미스 레어드 선교사(나애시덕 여사)의 '실용영어' 교육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펴낸 레어드 선교사 저기 겉표지.
영어회화를 배운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 나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한 한국 유학생을 여러 명 만나보고 또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한국의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토플시험에 응시해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둬 미국대학 혹은 미국 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고 온 대학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뛰어난 토플 성적과 GRE (Graduate Record Examination) 점수를 미국 대학원 입학원서에 첨부해 보낸다. 나는 함께 한국 유학생들의 입학원서를 심사했던 동료 교수들은 나에게 "한국 학생들은 다른 나라 어느 외국학생들보다 토플 성적이 매우 우수하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수한 대학교 성적과 500점이 넘는 토플시험 점수, 그리고 뛰어난 GRE 성적으로 입학허가를 받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지만, 대학원 세미나에서 영어를 자유롭게 말하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대학원 세미나에서 영어회화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대학원 세미나에서 한국학생들에게 "자기 자신 의견을 얘기해 보라"고 말하면 그들은 대부분 머리속에 암기 해 두었던지 아니면 마치 답장을 써서 암기한 영어문장을 암송하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옆에서 듣기에도 너무도 답답하고 또 민망할 때도 종종 있었다.
한국에서 토플시험과 GRE 시험성적을 올리기 위해 영어학원에서 공부하는 영어는 암기식 영어 교육이기 때문에 실제로 영어회화를 잘 할 수 있는 보장은 없다. 물론 30여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외국학생의 영어교육 문제를 인식한 미국의 대학들은 한국 학생들의 영어평가기준을 바꾸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게끔 교육방법을 빠른 시일 내에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내가 강원도 원주에서 미국선교사로부터 배운 영어의 발음과 회화방법은 60년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영어교육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점차로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 동료 교수들은 한국 유학생들의 딜레마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나의 동료 교수들은 "한국 학생들은 매우 우수한데 한국의 영어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동정심도 생겼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한국의 영어교육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유학생들의 영어'를 통해 눈치 챈 것이다. 최근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에서도 미국의 일상생활 영어를 중심으로 영어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한국의 영어교육은 미국식으로 많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됐다. 한국의 영어교육도 반세기전 우리가 영어교육을 받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제시대의 중학교 교육
내가 中·日戰爭 시대(1937-1945)에 일본이 중국을 침투공격하고, 1941년 12월 8일에는 진주만 공격을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한 1940년대에 서울에서 K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다. 미군 B-29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날아오고 있었으며, 곧 서울을 폭격할 것이라고 일본정부는 선전하면서 서울 시민 대부분을 지방으로 소개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강원도 원주에 단 하나밖에 없었던 원주 농업중학교로 전학했다. 가정 형편도 서울유학을 더 계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완전히 패망하고 조선(한국)은 해방됐다. 36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와 함께 일본식 교육이 종막을 내렸다. 그러나 일본 식민통치 시대에 내가 받은 교육은 문자 그대로 군사교육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일정시대에 국민학교와 중학교 과정 일부를 일본선생으로부터 배웠다. 때문에 나는 일본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또 일본 소설책과 신문 잡지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중일전쟁은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리고 10년 후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의 중일전쟁은 1940년대에는 美?日전쟁으로 확대됐고, 이윽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됐을 때, 우리 중학생은 공부는 모두 집어치우다시피 뒷날로 미루고, 근로봉사에 참여했다. 우리 중학생은 일본이 운영하는 병기공장에서 일했다. 또 시골 농촌에 가서 고구마를 심고 또 쌀을 생산하는 모심기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젊은 학생들의 노력 동원이었다. 우리들은 때로는 부평에 있는 병기공장에 배치돼 총과 총탄 그리고 포탄을 만드는데도 동참했다. 일부 중학생들은 농촌에 내려가서 군량미를 생산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나는 서울에서 하숙하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원주의 집으로 내려가서 원주농업중학교(일제시대에는 4년제, 해방 후에는 고등학교를 포함해서 6년제)에 다니기로 했다. 그 당시 강원도에는 춘천사범학교가 제일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사범학교 5년간의 학업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선생으로 임명되고, 월급을 받으며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범학교는 집안이 가난하고 매우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지망해 초등학교 선생이 되기를 희망했다.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조선의 각 도청 소재지에는 사범학교가 하나씩 설립됐다. 사범학교 제도는 소학교(국민학교) 교사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었다. 한반도의 13개 도청 소재지에는 13개의 사범학교가 설립돼 경쟁이 매우 심했다. 일제 시대의 사범학교에서는 수업료와 학비, 기숙사비와 학생들의 제복을 포함해 모든 비용은 관비로 지급됐기 때문에 무료였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교육을 통해서 한국과 같은 식민지의 국민을 일본화 시키는데 전력을 다 했던 것이다.
그외 직업학교가 있었는데 공업중학교를 직업학교라고 불렀다. 그리고 농업중학교, 상업중학교, 인문중학교의 경우 강원도에는 춘천중학교 하나 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부잣집에서는 아들을 춘천중학교에 보내고, 중학교 5년제(대동아전쟁 때는 4년제로 단축함)를 졸업한 후 일본 본토의 대학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의 외사촌 형은 춘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메이지 다이가꾸(明治大學)'에 진학했다. 1941년 大東亞戰爭이 나기 직전의 일이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대학제도가 전시체제로 변했다. 그리고 중학교제도에도 변화가 생겨서 5년제 중학교를 1년 단축해 4년제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국의 청소년들을 일본군에 입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나는 더 이상 서울에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에 처해 원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학비조달이 문제였다. 결국 나는 더 이상 학비와 하숙비를 조달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름과 좌절 속에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던 원주농업고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원주에서 8?15 해방을 맞이한 나의 감격을 어찌 다 펜으로 쓸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때 그 감격과 삶의 순간들은 반세기가 훨씬 넘은 오늘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계속>

Thursday, April 26, 2012

회고록 4 - 한 사람의 삶이 밝혀준 등불 … 인생의 초석을 다지다

한 사람의 삶이 밝혀준 등불 … 인생의 초석을 다지다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4) 영어공부반의 재원들
2012년 04월 25일 (수) 17:18:27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레어드 선교사는 1948년 겨울방학 동안 기독교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원주시내의 고등학생들을 위해 영어 회화 반을 열었다. 그것은 원주의 고등학교 선생들이 '羅 선생'에게 겨울 방학동안 영어 회화를 가르치도록 설득한 결과였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영어회화 선생님이 됐던 것이다. 이 인연은 내가 나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엄청난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유학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영어회화반은 20여명의 학생이 모여서 시작했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난 뒤 학생 수는 7~8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그 당시 '羅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운 우리 영어반에는 훗날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조성규 박사, 한국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거쳐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UNESCO) 본부 교육담당 전문가가 된 원창훈 선생,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사회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세대에서 10년간 가르친 후 다시 보스턴대로 돌아와서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정재식 박사, 서울신학대학 학장이 된 이상훈 박사,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사회사업박사를 받고 세계아동복지기구(UNICEF) 에서 봉사한 후 경남 김해의 인제대 총장이 된 이윤구 박사, 앨라바마 주립대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코네티컷州에 있는 사립대학 브리지포트 대(Bridgeport University)의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최규언 박사 등이 있었다.
또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영어회화반에는 대한교육총연합회(교총) 사무총장을 역임한 후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하신 정태시 박사,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은 후 뉴저지주립대, 럿트거스대(Rutgers State University)의 교수를 거쳐 美 교육부의 국장급 간부로 봉사한 송동수 박사, 뉴욕 총영사관의 3대 총영사로 있다가 에티오피아 대사와 스페인 대사를 역임한 장재용 선생, 그리고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교수를 역임한 김기순 선생 등이 있었다.
레어드 선생의 한국봉사 50여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기『기독교의 여인- 미스 레어드 (Miss Esther Laird, A Christian Lady)』(2000)에 수록된 공주교육대학 총장을 역임한 정태시 박사의 헌시는 레어드 선생의 한 평생을 잘 묘사하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 114번지 '원주 제일감리교회' 앞뜰에 세운 '미스 레어드를 위한 기념비'에는 "1983년 추수감사절에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님을 사랑한 친우 일동"이라고 쓰여 있다. 필자의 이름이 포함돼 있는 것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나애시덕 선생으로부터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작은 마음의 표시를 하기 위해서였다.
원주의 한 친구가 전해 준 말에 의하면 나 선생님의 기념비는 나 선생님이 생존해 있을 때 그를 사랑한 사람들의 깊은 사랑의 표시다. 레어드 선생의 기념비 뒷면에는 1946년 강원도 원주의 나 선생님 댁에서 영어회화를 배운 정태시 박사, 신숙철 여사, 장재용 선생 내외, 김기순 선생,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 영어회화반의 조성규 박사와 홍순범 선생의 이름이 보인다.

1926년 이 땅에 오신 나 선생님을 기림
젖 없는 아이 찾아서 밤새며 키우시고
깊은 병 앓는 이들 몸소 간호하셨고
길 잃은 젊은이들 꿈도 펴게 하시고
고달픈 이 쉴 집도 여럿 세우셨으니
크고도 따뜻하였어라 당신의 손길 당신

스스로는 병도 나이도 잊으신 채
한결같이 일에만 열중 하시더니
아아, 이 곳 다시 못 오시고 끝내 가셨고녀
주님의 십자가를 늘 지신 당신의 뜻
사랑의 밀알 되어 이 땅을 채우리라.
-정태시, 「헌시」

앞줄 왼편에서 이창호 장로, 두번째가 정태시 선생, 장재용 선생 사모, 뒷줄 오른편에서 신숙철, 정태시 선생 사모님, 함재영, 조성규 선생 부인, 홍순범 선생, 장재용 선생, 김기순 선생, 채호석 선생, 맨 끝의 8번째가 조성규 선생

레어드 선생과 까까머리 우리 고등학생의 인연은 매우 작은 것이었지만, 우리들은'羅 선생'을 통해 해방직후부터 미국의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대동아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된 후 매우 혼란스러웠던 한국사회에서 우리 청소년이 외국으로 나가서 공부하겠다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레어드 선생의 영어교육 덕택이었다.
나는 1947년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48년 겨울 방학동안 레어드 선생은 원주 기독교사회관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셨다. 우리 영어회화 반에서는 찰스 램의 『셰익스피어에서 뽑은 이야기(Tales from the Shakespeares, by Charles Lamb)』를 교재로 사용했다. 그것은 레어드 선생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이 결정했다. 당시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영어 교과서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그 교재를 매일 한 장씩 읽고 오전 8시에 영어회화를 시작했다. 그 책을 우리의 교재로 선택한 것은 해방 직후 유행처럼 많이 사용되고 있는 책이기도 했지만, 한국학생들은 셰익스피어를 읽어야만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羅 선생은 "고전을 무조건 외우는 식의 공부는 영어 회화공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어려운 책을 외우기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영어 단어를 많이 기억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은 집에서 읽기로 하고, 질문할 내용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이 있으면 회화반에서 영어로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실용적인 회화반으로 바꾸었다. 羅 선생님은 미국의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미국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영어 교과서를 구해서 우리 영어회화의 교재로 사용했다. 미국의 고등하교에서 사용하는 텍스트를 매일 한 장씩 읽고 그 내용을 자신의 머리 속에 요약해 두었다가 다음 날 회화반에서 회화체로 바꾸어서 그 내용을 자신의 영어로 되풀이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요사이 말 하는 이른바 회화식 잉글리쉬(Conversational English)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레어드 선생에 대한 전기는 두 종이 출판되었다. 하나는 『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인데 최종수 목사가 저술하고, 한국기독교연구소가 2000년에 출판했다. 영어로는 Life and Works of Ester J. Laird(by Rev. Asbury Jongsoo Choe, D. Min., Korean Institute of the Christian Studies, 2000)이다. 그리고 또 한 권은 『그리스도인의 여인- 미스 에스터 레어드(Miss Esther Laird, A Christlike Lady)』이다. 전자는 좀 더 학술적인 책이고 후자는 대전 기독교종합 사회복지관 48년 역사로 주로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대전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의 48년의 역사이다.
해방된 한국에는 1945년부터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를 전도했다.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와 장로교(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합하여) 선교사만 한국에서 선교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수십 개의 종파와 다른 종교를 합하여 수백 명의 선교사들이 각각 여러 종파를 대표하여 한국에 선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에는 수십 개 종파가 공존하며 선교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한국에는 서양의 천주교가 조선조 말인 1860년대에 들어와서 일찍 선교 사업을 시작했고, 이어 1903년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들어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연희전문학교 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또 세브란스병원 같은 현대적인 병원을 설립한 것이 기독교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 우리 한국의 영어교육이 상당히 많이 발전했다는 소식을 최근 미국에 오는 한국 유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나 60여년 전 우리가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울 때는 토플(TOEFL) 시험도 없었고, 또 영어학원도 없었다. 미국 사람을 만나면 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 단어 몇 마디를 사용해 대화 즉 컨버세이션(Conversarion)을 나누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우리가 羅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실용영어는 우리 각자의 일생에 매우 긴요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었다. 내가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중위로 임관된 것도 레어드 선생이 가르쳐 주신 영어회화의 덕택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나 선생님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계속>

Wednesday, April 18, 2012

회고록 3 -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 … 운명이 된 조우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 … 운명이 된 조우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3) 8·15 해방과 나의 영어공부
2012년 04월 18일 (수) 18:06:56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이 된 것은 1945년 8월 15일이다. 내 나이가 15세였을 때다. 한국이 해방된 후 6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방되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일본 식민지 통치 36년 동안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은 해방된 조국을 찾아왔다. 그들은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우리 중학생들은 일본 식민지 시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식민지 통치 밑에서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식민지 통치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 청년 학생들은 일본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군수공장에서 일했으며 또는 농장에서 근로봉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한국이 해방됐었을 때 우리 청년학생 들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갈구했다. 우리 중학생들 중 한사람도 빠짐없이 조국해방의 감격 속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것이 어제만 같은데 벌서 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우리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선으로 남북으로 분단했다.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한국의 독립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완전히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한반도 분단이 정착되기 시작했고, 남북 간의 분단은 반세기가 넘게 지속됐다.
한반도는 냉전시대의 소산물이다. 주한 미군은 6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해방 전후의 우리들의 역사를 어떻게 한권의 회고록에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조국이 해방된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깊숙이, 또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기록해 놓을 뿐이다.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우다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미국 기독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시 원주에 돌아와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1946년이다. 일제시대의 중학교에서는 영어의 알파벳 정도만 공부했는데 일본 선생들의 영어 발음은 웃기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홋도 이즈 잣또” (What is that?) “잣도 이즈 캿도” (That is a Cat) 식의 일본식 영어 발음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날 정도였다.
강원도 원주의 일산동에는 벽돌 양옥집이 3채가 있었다. 6?25전쟁 중 원주시내에 있던 모든 건물은 북한군이 원주를 점령했을 때 미군 항공기의 폭탄세례를 받고 다 파괴됐지만 일산동에 세운 양옥 벽돌집 세 채는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오른편의 붉은 벽돌 양옥집 한 채는 미국 선교사 에스터 레어드(Ester Laird. 그의 한국명은 羅 愛施德이다) 선교사가 살고 있었다. 다른 한 채는 켄터키 주의 애스베리대학(Asbury Collge)(2000년부터는 Asbu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찰스 스토크스(Charles Stokes) 박사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세번째 양옥집 역시 미국 켄터키주 의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한국에 파견된 감리교 선교사 벅크홀더(Buckholder) 부부가 입주하고 있었다.
스토크스 박사 부부와 버크홀더 선교사 부부는 애스베리대학을 졸업하고 해외파견 선교사로 자원한 인물들이다. 1945년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원주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했던 그들은 우리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겨울 방학에는 영어회화반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원주농업고등학교 선생들 중 정태시 선생, 장재용 선생, 송동수 선생 등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선생님들이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느끼고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수한 학생 몇 명을 선발해 레어드 선교사(나 애시덕)가 겨울방학동안에 이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쳐 준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주 주일날 오후 2시에는 레어드 선교사 자택에 선생님들과 학생들 10여 명이 모여서 영어예배(English Worship Service)도 보기 시작했다. 영어회화반에 다니던 우리 고등학교 학생도 초대됐는데, 영어회화를 실제로 생생하게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70여 년 가까이 지난 오늘 그 당시의 영어공부 하던 시절의 일들은 내 기억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미국감리교 선교사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봉사활동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실용적이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선교사의 헌신적인 영어교육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한국전쟁 당시에 육군 연락장교로서 미국군과 한국군 지휘관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가 미국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영어로 공부하고, 또 영어회화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터 레어드 선교사를 비롯해 앞서 말한 이들, 그리고 세디 모어 (Sadie Moore)선교사, 단기 선교사로 파견된 젊은 스핀드로우(Spindlow) 선교사의 덕택이었다. 나는 늘 이들에게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헌신적인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영어교육을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의 개척정신과 선견지명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원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시고 나를 영어 성경반에 인도해 주신 고등학교 은사님 정태시 선생 (대한교련 사무총창을 거처 공주사범대학 총장 역임), 장재용 선생 (한국 외무부에서 주 뉴욕 총영사, 스페인 대사 역임), 그리고 김기순 선생 (한국외국어 대학 영어교수 역임)의 지도와 편달에 항상 깊은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ster Laird (羅愛施德)선생, 그는 누구인가?

Ester Laird(나애시덕) 선교사(1960)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훗날 김일평 교수가 있게 만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나애시덕(Ester Laird) 선생은 나의 은사이며 잊을 수 없는 미국 사람(Unforgettable American) 이기 때문에 나의 운명적인 선생으로 소개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중학생시절 겨울방학 동안 나 선생으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또 나 선생 때문에 성경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으며, 한국동란 때는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임관해 연락장교로 복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애시덕 (Ester Laird) 선생은 누구인가?
레어드 선생은 1901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고 딕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종교교육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모닝 선 스쿨(Morning Sun School)에서 교편을 잡은 경험도 있다. 1926년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강원도 원주에 파견돼 1930년부터 기독교여자사회관, 영아원, 결핵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부녀자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끈질긴 선교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녀는 안식년인 1927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1930년까지 3년간 고향에 머물면서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에 필요한 기금을 모금해 1931년 원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원주 기독교 여성회관 관장의 책임을 맡아서 10여 년 동안 봉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 일본제국주의 군부지도자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식민지 조선에서 추방했다. 레어드 선교사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있는 베데스타 병원 부속 간호대학에서 간호사 전문교육을 받고 졸업했다. 그녀의 삶은 봉사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일관됐다. 그녀는 이후 병원에서 일하며 전문 간호사를 교육할 수 있는 간호사교육 자격증도 받았다.
레어드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된 후 1947년에 원주로 다시 돌아와서 6·25전쟁이 나던 1950년까지 기독교 사회사업을 계속하면서 기독교 청년 지도자를 많이 육성했다. 그녀는 원주의 사회봉사회관에 유아원을 설치하고 어린아이가 출생했을 때 모유가 부족한 어린 영아들을 모아 우유를 공급해서 새로 출산한 아이의 생명을 구해주는 구명사업도 원주 기독교 사회사업관에서 함께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의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해(그 당시 원주에는 여성이 승용차를 스스로 운전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몇 십리가 넘는 시골길을 달려가서 모유가 부족한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분유를 먹였다. 당시 시골의 어머니들은 외국인 여성에게 자기의 갓난아이를 선뜻 외국인에게 맡길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유를 먹이는 것도 반대하는 전통적인 어머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레어드 선교사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성어린 사업에 감복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강원도 원주의 여러 동리에서 레어드 선교사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원주 시민들 사이에는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 원주 사람들은 그녀를 '羅 부인' 또는 '羅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에스터 레어드'였기 때문에 한국 이름을 '羅 愛施德'이라고 지어 주었다. 사랑을 널리 베풀고 덕이 많은 羅 선생이라는 말이다. 우리 고등학교의 영어 선생님들은 羅愛施德 선교사로부터 영어회화를 배웠기 때문에 더 훌륭한 영어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한국동란 후에는 외교관이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또 국제적인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나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전기는『한국을 위해 몸바친 나애시덕 선교사』(최종수 지음,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를 참조하기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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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에서 "한국교회사"를 가르치시는
김흥수 교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와서 본문을 약간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교수신문에서 우연히 선생님의 글 ("해방 이듬해 나애시덕 선교사와 만나")을 발견하고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글 중에 "캔터키 주의 애스베리대학 (Asbury College)(2000년 부터는 Asbury University)을 졸업하고 듀크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찰스 스톡스 박사 부부는"을 언급하셨습니다. 스톡스 박사는 Asry College 와 Asbury Seminary 에서 공부한 후 듀크대가 아니라 예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논문 "History of Methodist Mission in Korea 1885-1930 은 몇해전 한글로 번역되어 서울에서 간행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보고 서신도 "Letters of Charles D. Stokes로 서울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김흥수 교수님 매우 감사합니다. (저자 드림)

회고록 2 - 한국인과 미국인, 역사 경험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한국인과 미국인, 역사 경험의 차이를 극복하려면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2)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
2012년 04월 04일 (수) 17:47:18 김일평 미 코넷티컷대 명예교수 ilpyongkim31@gmail.com
나는 무엇 때문에 나의 회고록을 쓰게 됐는가? 20여 년 전(1980년대)에 서울에서 개최된 어느 학술회의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토론시간에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 차이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국가이익의 상충, 한국전쟁 후 한·미관계 50년의 역사상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대해 매우 다양한 토론을 전개 하면서 한국과 미국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매우 심각한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반세기가 넘게 살았다. 대학부터 대학원에 이르기 까지 10여 년을 공부하면서 또 대학교의 교수생활을 40여 년 동안 하면서 미국에 60년 가까이 살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에만 집중하고 학문세계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미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축적됐고 또 미국을 보는 새로운 관점도 생겼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에 유학 오는 유학생들에게 미국사회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방법도 자연히 가르치게 됐다. 미국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이며 또 슬기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각종 분야에 걸쳐 상담하기도 했다. 미국생활의 지혜도 생겼을 뿐만 아니라 또 미국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얻게 됐다. 이런 점에서 앞선 글에서 나는 '한국에서 미국유학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나의 회고록이 도움이 되고 또 미국유학을 떠나는 유학생과 미국으로 유학 오는 한국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지침서 또는 참고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했거니와, 이것이 내가 회고록을 쓰는 동기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미국에 관한 지식과 미국문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 정도는 미국사람의 한국에 대한 지식과 이해 정도와는 차이점이 많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왜 우리나라에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미군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가? 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 대해 무엇을 배우고 또 미국의 미래에 대해 무엇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미국에 대해 축적한 나의 지식은 미국을 이해하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이해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것이 또 다른 집필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학생과 젊은 세대가 품고 있는 반미감정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한국인과 미국인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상호간의 이해가 증진 된다면 반미감정은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일선에서 복무하면서 미군장교와 장성들 그리고 한국군 장성과 장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통역한 경험도 있다. 또 각계 각층의 한국군 참모들의 생각과 작전 계획을 미군장교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노력한 경험도 있다. 또 미국 측의 생각과 작전계획을 한국군 장성들에게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가교역할도 했다. 따라서 우리 연락장교들은 한국과 미국 쌍방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제2군단본부에서 벤프리대장 통역-좌로 부터 유재흥 군단장,백선엽참모총장,필자, 베프리트 대장.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매우 심각했고, 한미 간의 가치관의 차이를 서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맹국 사이에도 마찰이 많이 생기고 또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한미 간에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여건도 많이 있었다.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 차이와 사고방식의 다른 점은 정책결정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상호간의 갈등요소가 된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고 미군 제8군사령부가 1950년 한국전쟁 후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아직도 서울에 주둔하고 있다. 한미 간의 견해 차이는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견해차이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지 검토해 본 후 상호간에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한미 간의 견해 차이를 해소하고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나는 생각했다.
미국인들의 말과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문화와 역사는 물론 미국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의 유학생활에서 얻은 일상생활의 경험은 미국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또 내가 미국에서 배우고 축적한 많은 지식과 지혜를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와 지식층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이해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또 우리 조국의 젊은 세대, 즉 신세대의 애국심과 독립정신 그리고 민족주의를 미국사람들이 깊이 이해하고 납득 할 수 있게끔 내가 설명하고 교육할 수 있다면 한미관계의 새로운 미래상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동시에 또한 바람직한 결과를 창출해 낼 수 있다면, 한미관계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세기가 넘게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했다. 또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교수생활을 하면서 미국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도 생겼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며, 미국사람들이 경험한 개척정신과 현대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와 비교하고 미래를 연구 할 수 있다면 나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비교연구는 한미상호간의 이해도 증진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과 미국사이의 견해의 차이로 생기는 두 나라 간의 마찰과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따라서 나의 회고록이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갈등을 좁히고 상호간의 이해를 증진하며 서로 협조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비교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미국에 사는 우리 동포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미국인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한미관계의 갈등과 마찰도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나의 회고록은 학술적인 논문도 아니고 또 정치평론은 더욱 아니다. 나는 다만 미국유학 반세기동안 나 자신이 얻은 지식과 경험을 평범한 글로 써서 미국에 유학을 꿈꾸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고 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은 어떻게 변했으며,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어떻게 변했으며, 우리 한국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는지 이해하고 상호교류하며 지내는 데 작지만 도움 되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韓人들은 미국에 살면서 미국사람들 최상의 가치관인 '인간의 존엄성'을 잘 이해하고 미국 내에 형성된 한인사회(Korean Community)에도 인권의 존엄성이 신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미국사회의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인종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나의 회고록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계속>

회고록 1 - 후학에게 주는 미국 유학 60년의 교훈과 지혜

후학에게 주는 미국 유학 60년의 교훈과 지혜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회고록(1) 연재에 앞서
2012년 03월 13일 (화) 16:32:04 김일평 미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editor@kyosu.net
김일평 코네티컷대 명예교수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미국 내 한국학 연구의 ‘1세대 전문가’로 꼽히는 김일평(金一平·81·사진) 코네티컷대 명예교수는 뛰어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1931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휴전이 된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켄터키주 애스베리대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했다. 1963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1965년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98년까지 코네티컷대에 봉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외교연구원 교수 등 미국내 연구자들을 지도, 후원하기도 했다. 국내 학자로는 김동성 중앙대 교수, 김동수 서울시립대 교수, 남정휴 경기대 교수, 기기정 연세대 교수, 홍욱헌 포스텍 교수, 김병일 경희대 교수 등이 그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교수신문> 김일평 교수의 회고록 '미국 유학 60년'을 이번 호부터 소개한다. 김일평 교수 회고록은 <교수신문> 인터넷판에 매주 연재될 예정이다. 김 교수의 회고록은 미국 내 한국학 연구 1세대의 형성과 그 과정에서의 자긍심, 그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국내 학계의 지적 교류 풍경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해 보겠다고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 1953년 9월 이였으니 벌서 반세기가 지나고 60년도 넘은 세월이 흘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도 많이 변하고 나도 많이 변했다. 물론 한국도 변하고, 세계도 천지개벽을 했다고 할 만큼 변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나는 미국에 유학생으로 와서 공부하면서 또 대학에서 젊은 세대를 가르치는 교수생활을 하면서 미국도 변하고, 한국도 변하고 그리고 세계가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미국유학 반세기 동안에 배운 것과 나의 인생경험을 나의 회고록에 기록해 놓기로 했다. 한국에서 미국유학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유학지망생과 그리고 우리 후세들에게 나의 회고록은 '미래에 대한 그들의 예측'이 될 수도 있고, 또 미래를 향한 역사적인 교훈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지난 해 타계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Paul Samuelson)은 그해 6월 “역사야 말로 어떤 가설이나 실험보다 더 좋은 자료"라고 말하면서 역사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촉구한 바 있다. 나는 한국 유학생으로 1950년대에 미국에 와서 미국의 역사를 배우면서 공부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실질적으로 경험했던, 살아있는 역사를 여기에 기록해 놓고자 한다. 나의 회고록은 격동기의 반세기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1930년 5월 5일 (경오년 말띠)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영월은 우리 조선역사의 6대조 단종왕의 묘가 있는 곳이 아닌가. 그리고 만주사변 (1931), 중일중전쟁 (일본과 중국의 전쟁, 1937~1945), 그리고 대동아 전쟁(제2차 세계대전, 1941~1945) 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차분하게 공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미국으로 유학하면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 (Korean War. 최근 한국언론에서는 6·25 전쟁이라고 통일함) 와중에서 나는 20대의 나이에 한국 육군 연락장교로 전쟁에 참전했다. 한국군에서 3년간의 육군 연락장교의 임무를 끝마치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다. 6·25전쟁 중 나는 연락 장교로서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역할을 담당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내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초반 25년간은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격동 속에서 흘러갔으며, 곧이어 6·25전쟁 중 일선에 나가서 전투에 참가하는 경험도 해 보았다. 그리고 남은 반세기는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또 미국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한국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도 있었다. 6·25전쟁 당시 잿더미로 변한 한국 땅에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 꿈을 품고 미국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수속을 거치고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직후, 23세의 나는 그해 9월에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유학은 한국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 같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나는 미국에서 유학생의 생활도 해보았고, 또 미국 대학교에서 교수로 오래 생활하기도 했다. 그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웠던가? 또 내가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나의 유학 60년을 돌아보면서 유학생으로서의 생활과 미국대학의 교수로서의 생활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놓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한국 학계에 다소나마 쓸모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이 소소한 회고에 담긴 한국 지식인의 미국 유학 과정과 지식의 습득이 우리 후배들에게 하나의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보람 있는 '회고'일 것이며, 응당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유학생활 과 미국대학에서 교수로 생활하면서 목격한 미국의 현대 역사도 이 회고록의 풍경에 포함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미국유학을 떠나게 됐으며, 낯선 미국사회에서 유학생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미국 역사를 배워왔는지, 그리고 미국 현대사에 대한 나의 느낀 바를 가능한 한 복기해내며 기록하고자 한다. 미국 유학생의 생활은 1950년대나 2000년대의 오늘까지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의 회고록에는 특히 미국에서 겪는 한국 유학생들의 고충, 그들의 의미 있는 학위취득 과정도 기록될 것이다. 역시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을 한국의 후학들에게 내밀한 미국 대학가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선택을 돕고자 하는 뜻에서다. 나의 회고록이 그들에게 하나의 '지침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미국으로 유학하는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미국의 역사와 미국사회의 변천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또 미국사회의 변천과정을 조금이라도 공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종종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살아왔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나침반이 된다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이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나는 '배우면 알고, 알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경구를 등불처럼 밝혀 집필 동기를 잃지 않고자 했다. 나는 한국에서 사반세기(25년) 동안 살았다. 또 미국에 와서는 반세기 넘게 살았으니 동양과 서양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비교할 수 있는 지혜와 철학도 얼추 생겼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어떻게 미래에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작은 회고록이 그런 문제를 환기한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또 나의 회고록을 통해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비교 연구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접목 할 수 있을지 비전과 방법을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인류의 희망사항인 세계평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 이 노구의 회고록을 통해 우리가 다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계속>